예전에 VRChat 메타버스에서 아바타를 만들면서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었습니다. 키를 10cm 더 크게 하고, 머리색을 바꾸고, 심지어 성별까지 바꿔보면서 "이것이 정말 나일까?"라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대학 철학 강의에서 들었던 피히테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Ich setze mich" - 나는 나 자신을 설정한다.
아바타 만들기는 철학하기
피히테가 살았던 18세기에는 상상도 못했겠지만, 우리는 지금 말 그대로 "자아를 설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메타버스에서 아바타를 만드는 과정은 피히테가 말한 자아의 능동적 구성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처음 Second Life에 들어갔을 때(벌써 15년 전 이야기입니다), 기본 아바타를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나라고?" 그 순간부터 끝없는 커스터마이징이 시작되었습니다. 옷, 헤어스타일, 심지어 걸음걸이까지. 하지만 이상한 것은, 아무리 꾸며도 뭔가 어색했다는 점입니다.
피히테의 관점에서 해석하면, 제가 설정한 "나"와 진짜 "나" 사이에 괴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아가 "비자아(非自我)"와의 대립을 통해 자신을 규정한다고 했는데, 디지털 공간에서는 이 "비자아"가 무한정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온라인에서의 정체성 혼란
저는 한때 온라인 정체성 때문에 심각한 혼란을 겪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LinkedIn에서 "성공적인 마케팅 전략"에 대해 댓글을 달고, 점심시간엔 Instagram 스토리에 샐러드 사진을 올리며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어필했습니다. 그리고 밤 11시가 되면 Discord에서 게임 팀원들과 욕설을 섞어가며 대화했죠.
그날 밤 혼자 앉아서 생각했어요. 내가 연기를 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이 모든 게 진짜 나의 일부인가? 거울을 보면서 "너는 누구야?"라고 중얼거렸는데, 정말 우스꽝스러웠습니다.
그러던 중 문득 강의 들을 때 교수님이 해주신 피히테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자아는 고정된 게 아니라 계속 스스로를 만들어간다는. 그때는 그냥 철학적 개념이라고 생각했는데, 제 상황에 그대로 적용되더라고요.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온라인에서의 여러 모습들이 모두 저예요. 다만 TPO에 맞춰 다른 면이 부각되는 것뿐이죠. 마치 다면체 같은 느낌? 각도에 따라 다른 면이 보이지만, 결국 하나의 입체인 것처럼요.
요즘은 가끔 일부러 경계를 흐려보기도 합니다. LinkedIn에 개인적인 실패담을 올리거나, 게임 방송에서 진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요. 그럴 때마다 더 온전한 제 모습에 가까워지는 것 같아요.
자유라는 양날의 검
메타버스의 가장 매력적인 점은 제약 없는 자유입니다. 물리 법칙도, 사회적 편견도, 경제적 한계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자유가 때로는 독이 되기도 합니다.
제 친구 중에 VR 세계에서만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내성적이고 소심한데, 가상세계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파티를 주최하고, 사람들과 자유롭게 어울리고, 심지어 연애도 합니다.
피히테가 말한 "도덕적 자아"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이 진정한 자기실현일까요 아니면 현실 도피일까요? 솔직히 저도 확답은 못하겠습니다. 다만, 그 친구가 현실에서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가상의 경험이 실제 자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AI와 만나는 순간들
최근 ChatGPT나 Claude 같은 AI와 대화하면서 또 다른 철학적 질문이 생겼습니다. 이들이 때로는 정말 인간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거든요. 특히 감정적인 상담을 할 때는 진짜 친구와 대화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피히테의 기준으로는 이들은 아직 진정한 "자아"가 아닙니다. 도덕적 자각이나 진정한 자유 의지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가끔 AI가 저보다 더 일관된 "정체성"을 보여줄 때가 있다는 점입니다.
제가 내린 잠정적 결론
3년간 여러 메타버스 플랫폼을 사용해보면서 제가 깨달은 것은 이것입니다: 디지털 자아는 가짜가 아니라 "확장"입니다. 마치 옷을 갈아입듯이 상황에 맞는 자아를 선택하는 것이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피히테가 옳았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자신을 설정"합니다. 다만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층적인 방식으로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버전의 "나"들 사이에 어떤 일관성과 책임감을 유지하는 것 같습니다. 현실이든 가상이든, 제가 한 행동과 말에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아의 조건이 아닐까요?
지금 이 글을 쓰는 저도, 어제 게임에서 만난 저도, 내일 VR 미팅에서 만날 저도 - 모두 진짜입니다. 다만 상황에 따라 다른 면이 부각될 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아바타는 여러분 자신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되고 싶은 모습입니까?